[열린광장] 인내의 시절에서 해결의 시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불후의 비극 ‘햄릿’에서 현실을 수용할 것인가, 복수를 결행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갈등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햄릿은 제3막 1장의 독백을 통해 “사느냐 죽느냐(또는 존재하느냐 아니냐로 번역되기도 함),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며 “어느 것이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맞을 것인가, 무기를 들고 고난의 바다와 맞서다가 마지막을 맞을 것인가?”라며 고뇌한다. 햄릿은 결국 격투를 벌이다 독살되고, 왕실은 공멸하지만, 인류역사와 문화의 큰 물줄기를 바꾼 성인들은 혹독한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지구촌을 밝혀주는 빛이 되었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절명의 희생으로 사랑의 종교를 우뚝 세웠고, 싯다르타는 긴 수행과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7일간의 명상으로 해탈에 이르러 만인의 부처가 되었다. 공자는 고국 노나라를 떠나 13년 동안 제자들을 이끌고 주변국을 고행하며 유교의 기초를 다졌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정신문화와 사회체제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유교는 일면 참음의 교리이다. 나라를 통치하는데 유리한 위계를 세우고, 아랫사람이 위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질서를 뼈대로 삼았다. 삼강오륜이 일견 그렇고, 세상의 모든 제도와 정신이 같은 원리로 설계되었다. 백성과 임금,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나이 차이 등도 계층화하고 위를 참고 따르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우리 선조들은 그런 전통문화 속에서 인내를 지고한 미덕으로 여기고 이래저래 참으며 살았다. 신체적인 고통도 참고, 인격과 품성에도 참음을 높이 샀으며, 공동체에 적응하면서도 충돌하기보다 되도록 참고 양보하는 것이 더 평가를 받았다. 바람이 계절을 어김없이 바꾸어 놓듯이 세월을 이기는 문화도 없다. 고대문명과 헬레니즘, 비잔틴, 르네상스 문화, 한(漢)문화도 이제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 문화변동의 자취와 토양으로만 잔류한다. 중세 이후 피어난 휴머니즘은 참혹한 전쟁과 사조(思潮)의 부침, 과학의 발전을 거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치켜 올려 오늘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꽃피게 했다. 최근에는 그 위에 첨단 과학이 생성하는 신인류의 고도로 진화된 삶의 유형이 너울성 파도처럼 몰려왔다. 당연히 오래된 미덕과 선의 개념도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참음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상에 밀리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가고, 생활용품에 문제가 생기면 새로 구입하거나 서비스 센터에 연락한다. 일터에서 불만스러우면 직장을 바꾸고, 단체의 운영이 매스꺼우면 탈퇴해버리며, 가족 간에도 갈등이 생기면 가정법원을 향한다. 머리 아픈 일은 애초에 피해버린다. 무엇이든, 어떻게 하든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인간의 생존 조건은 아직도 두려운 대상이고, 천차만별의 개성들이 얽히고설켜 직조된 문화는 서서히 움직인다. 그렇지만 시대는 빠르게 전진하고 있고,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의 이상형(ideal type)적 특성을 빌려 규정한다면 ‘인내의 세상은 물러나고 전향적인 해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열린광장 인내 동북아시아 문화권 사회과학자 막스 고국 노나라